숫자는 살아났지만, 업계의 체감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표면만 보면 2025년은 분명 회복의 해였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25년 신규 벤처투자는 13조6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4% 늘었고, 신규 벤처펀드 결성액은 14조3000억원으로 34.1% 증가했다. 딜 수는 8542건으로 역대 최고였고, 민간 출자 비중도 80%까지 올라왔다. 특히 연기금과 공제회 출자는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었다. 숫자만 보면 돈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업계가 지금 집중하는 키워드는 투자 확대가 아니라 회수시장 활성화다. 숫자와 체감이 어긋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투자 부족이 아니라 돈이 나오는 문이 좁다는 데 있다
2026년 정책 방향은 이 병목을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중기부는 2026년 모태펀드 1차 출자에서 회수 활성화 분야 출자 규모를 전년 대비 4배 확대했고, 세컨더리 펀드 2000억원, M&A 전용 펀드 1000억원 조성을 내걸었다. 2025년 12월 발표한 벤처 종합대책에서는 일반 세컨더리, LP 지분 유동화, 컨티뉴에이션 펀드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업계도 같은 신호를 보낸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2026년 사업의 타깃을 회수시장 활성화에 두고, 락업 규제 완화, 상장 전 우선주 보통주 전환 관행 개선, 세컨더리·테일엔드 펀드 확대를 과제로 제시했다. 회복기 시장에서 모두가 출구 얘기부터 한다는 것은, 지금의 핵심 병목이 투자 집행이 아니라 회수 경로라는 뜻이다.
한국 VC는 회사를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장 가능한 시간을 산다
이 대목에서 한국 VC 시장의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난다.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현재 국내 VC 펀드의 만기는 대체로 7~8년인데, 기업 설립부터 상장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은 13년 수준이다. 정부가 10년 이상 장기 만기 펀드를 우대하겠다고 한 것도 이 시간차를 인정한 결과다. 반면 글로벌 주요 VC는 통상 10+2년 구조를 쓴다. 이 간극 때문에 한국 VC는 회사를 오래 키워 최고의 순간에 파는 산업이라기보다, 펀드 만기 안에 상장 가능한 회사에 더 가까이 붙는 산업으로 기울기 쉽다. 스타트업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회사만큼이나 회수가 가능한 시점을 함께 산다.
그래서 시장의 돈은 점점 더 ‘설명 가능한 성장’ 쪽으로 몰린다
중기부 통계도 그 방향을 보여준다. 2025년 투자금의 54.4%는 업력 7년 초과 기업으로 갔고, 7년 이하 기업 비중은 45.6%였다. 초기기업 투자도 늘긴 했지만, 전체 흐름은 더 성숙하고 성장 이력이 보이는 회사로 기울었다. 이는 단순히 보수화라고만 보기 어렵다. 출구가 불확실할수록 투자자는 기술의 잠재력보다 회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성장 곡선을 더 선호하게 된다. 결국 돈은 혁신성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돈은 지금도 여전히, 상장 심사와 시장 수용성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설명 가능한 성장 쪽으로 흐른다.
세컨더리와 M&A는 해법처럼 보이지만, 아직은 보조 출구에 가깝다
물론 변화는 있다. 정부는 세컨더리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도입했고, 구주 매입에 대한 주목적 투자 인정 특례도 유지하고 있다. 업계도 세컨더리 펀드와 LP 유동화 구조를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 하지만 이 흐름 자체가 강한 이유는 아직 한국 시장에서 세컨더리와 M&A가 IPO를 대체할 만큼 충분히 넓고 깊은 출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책이 계속해서 인센티브를 붙이고 제도를 보완해야 겨우 움직인다는 사실은, 이 경로들이 아직 자생적 출구라기보다 보완적 출구에 가깝다는 뜻이다. 한국 VC 시장은 출구 다변화를 말하고 있지만, 아직 출구 다변화가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수준까지는 가지 못했다.
진짜 병목은 회수 공백이 VC를 ‘긴 돈을 못 다루는 산업’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단순히 회수를 늦춘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긴 출구를 기다려야 하는 AI·반도체·딥테크에는 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민간 LP는 여전히 빠른 회수를 선호하고, 금융권 LP도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장기 만기 펀드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서 정부는 모태펀드 1차 출자에서 회수 활성화뿐 아니라 LP 플랫폼 펀드, 장기 만기 펀드 우대, 지역·초기 투자 인센티브를 동시에 꺼내 들었다. 표면적으로는 자금 공급 확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VC 시장이 아직 긴 기술을 긴 돈으로 버티는 구조를 충분히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투자 회복이 진짜 회복이 되려면, 돈이 들어오는 속도보다 돈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먼저 길어져야 한다.
DIM의 해석
지금 한국 VC 시장의 표면은 회복이다. 돈이 다시 돌고, 딜은 늘고, 민간 출자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본체는 아직 회복이 아니다. 이 시장의 본체는 투자는 살아났지만 회수는 아직 정책과 제도에 기대고 있는 반쪽짜리 정상화에 가깝다. 그래서 많은 VC가 스타트업의 미래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펀드 만기와 IPO 창구 사이의 시간차를 버티는 게임을 하고 있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한국 VC는 계속해서 회사를 키우는 산업보다 상장 가능한 회사를 미리 찾는 산업에 가까워질 것이다. 돈은 다시 돌기 시작했지만, 한국 VC의 출구는 아직 닫혀 있다. 그리고 그 닫힌 문이야말로 지금 이 업계의 가장 비싼 리스크다.